[한국농정신문 유승현 기자]
화창한 가을날, 평소 한적하던 민통선 안 들녘에 벼베기와 각종 체험을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어린이들은 처음 잡아보는 낫으로 벼를 베고, 농민과 도시농부들은 수확의 기쁨을 나눴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마음으로 심은 벼를 함께 거두는 자리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강원도연맹과 철원군농민회는 3일 강원 철원군 민통선 내 ‘평화의논’에서 ‘2026 철원군 통일쌀 벼베기’를 진행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통일쌀 벼베기와 새끼 꼬기 체험, 소원지 적기, 새참 간담회 등이 이어졌다.
통일쌀은 전농이 ‘먹거리를 나누면 평화가 온다’는 취지로 전국에서 재배·수확하는 쌀이다. 철원에서는 민통선 내 평화의논에서 오대벼와 토종벼를 재배한다. 수확한 쌀의 판매 수익은 통일운동과 재일 조선학교 등을 후원하는 데 쓰인다. 특히 철원 평화의논에는 색깔이 서로 다른 토종벼를 활용해 한반도 문양을 조성, 통일의 염원을 담았다.
2004년 시작해 올해로 22회째를 맞은 이번 행사에는 역대 행사 가운데 처음으로 강원특별자치도지사가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양구군농민회와 전농 경기도연맹, 파주시농민회, 연천군농민회 등 농민단체를 비롯해 춘천농민한우,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 강원도연합회, 한국새농민중앙회 강원도연합회, 농가주부모임 강원도연합회 등 농업 관련 단체가 함께했다. 강원도시농업사회적협동조합과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 인하대 도시농업동아리 씨앗 등 도시농부들도 자리를 찾았다.
“돌리고, 베고”…고사리손에 들린 낫
이날 행사장에는 철원 주민과 농민은 물론 경기·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참가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인천에서 온 박승용 씨는 “인천에서 도시농부로 활동하는 장모님의 소개로 행사를 알게 돼 아들과 함께 참여했다”며 “벼베기와 새끼 꼬기 등 체험도 흥미롭고, 통일을 기원하는 뜻깊은 행사에서 아들과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아들 박서준(9) 군도 직접 낫을 들고 벼베기에 나섰다. 박 군은 “돌리고, 베니 벼가 쉽게 베였다”며 “낫을 처음 잡아보는데 재미있어 계속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참가자들은 풍년가와 사물놀이에 맞춰 한반도 모양으로 조성된 논에서 벼를 베고, 서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가을 들녘의 정취를 즐겼다. 농민들이 준비한 우리 농산물로 차린 밥상을 함께 나누며 먹거리의 소중함도 되새겼다.
도지사 첫 참석…농민들과 들녘 새참 간담회
우상호 강원특별자치도지사는 22년간 이어진 철원 통일쌀 벼베기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우 지사는 벼베기 체험에 참여한 데 이어 들녘에서 농민들과 새참 간담회를 열고 농업 현안과 지역 농업의 발전 방향을 논의했다.
간담회에서는 강원도 농업정책을 비롯해 철원 화훼농가들이 지역에서 생산한 꽃으로 곳곳을 꾸미는 사례, 철원 오대쌀의 의미, 인천의 도시농업 현황 등 다양한 주제가 격의 없이 오갔다. 우 지사는 1시간 넘게 자리를 지키며 농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눴다.
전농 각 지역 농민회가 전국 곳곳에서 통일쌀 벼베기를 이어가는 가운데, 본지는 접경지역이자 분단의 상징성을 지닌 철원에서 이 행사를 도 차원으로 확대할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철원 출신인 우 지사는 신중하면서도 농업·평화 정책 추진 의지를 내비쳤다.
우 지사는 “이 자리에서 확답할 수는 없지만, 평화의 논 뒤로 보이는 북녘을 바라보며 언젠가 남북 농민들이 함께 벼를 베는 모습을 상상하니 뭉클했다”며 “농촌 출신 도지사로서 임기 동안 농업 발전을 어떻게 바꿔 나가는지 기대해 달라. 강원도에서부터 모범적인 농촌정책을 펼쳐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용빈 전농 강원도연맹 의장도 농업과 통일을 위한 도정의 역할을 당부했다. 김 의장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북의 길이 열린다면 우 지사와 함께 손잡고 가기로 약속할 정도로, 도정에서 통일과 농업을 위한 정책을 펼쳐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어 “분단은 됐지만 하늘은 연결돼 있고, 저 너머 북녘 산자락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이곳 철원평야를 적시고 있다”며 “전쟁은 전쟁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먹거리를 나누고, 통일벼를 기르듯 평화를 길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