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순해서 마음이 곱소, 뚝배기 넘도록 따라나 보세, 어깨춤 나도록 마셔나 보세, 얼씨구 우리는 이름이 농군.”
1939년 1월5일자 ‘동아일보’ 4면엔 민요 당선작인 황용남의 ‘농군의 노래’가 실렸다. 이 노래 앞 구절엔 “맑은 술 독해서”라는 대목이 있다. 맑은 술은 바로 청주나 약주를 가리킨다. 실제로 1935년에 나온 ‘조선주조사’를 보면 1916년 경기도산 약주의 알코올 도수는 14∼19.9도였지만, 탁주는 8.8∼10.7도에 지나지 않았다. 순한 막걸리는 농군의 술이었다.
왜 농민의 술이었을까? 우선 값이 쌌다. 1934년 경기도 문산의 술도가에서 약주 한말이 5원일 때 탁주 한말은 1원80전이었다. 더욱이 막걸리는 끼니를 대신할 수 있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펴낸 이용기는 “추운 날 막걸리 한 사발에 잘 끓인 술국 한그릇이면 추위를 막고 배를 채워주니 산삼·녹용도 이만큼 빨리 효험을 내기 어렵다”고 했다.
이용기가 적은 막걸리 빚는 법은 이렇다. 하등 쌀이나 싸라기 한말을 쪄서 식힌 뒤 누룩 넉장쯤을 찧어 섞는다. 여름에는 누룩을 반장 더 넣는다. 맑은 술보다 물을 더 붓고 덮어두면 겨울에는 열흘, 여름에는 이레 만에 익는다. 이것을 걸러 술맛을 봐가며 물을 친다. 주재료는 결국 멥쌀이었다.
문제는 그 멥쌀이 주식인 밥의 재료라는 데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양곡관리법’으로 쌀 수급을 관리했다. 1962년 벼농사가 대흉작을 맞자 재무부는 고시를 내려 1963년 3월1일부터 막걸리에 쌀 사용을 금지했다. 1965년 한때 쌀을 20%까지 허용했다가 1966년 8월28일부턴 미국에서 원조받은 밀을 제분한 밀가루로만 막걸리를 빚게 했다. 그해에만 2억3000만달러어치 밀과 밀가루가 원조로 들어왔다. 일본 코지(麹)와 비슷한 누룩균을 쓰자 발효 기간이 120시간에서 70시간으로 줄었다. 덜 발효된 채 소매점으로 옮겨진 밀 막걸리에선 톡 쏘는 탄산맛이 났다.
1975년 ‘통일벼’로 사상 최고 수확량을 거둔 뒤 풍작이 이어지자 정부는 1977년 12월15일 쌀 사용 금지를 풀었다. 그러나 부활한 쌀막걸리엔 톡 쏘는 맛이 없었다. 술꾼은 사이다를 섞어 마셨고 제조업자는 탄산을 넣어 밀 막걸리 맛을 흉내 냈다. 밀 막걸리의 탄산맛은 술꾼들의 입맛을 단단히 붙잡았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면서 쌀 시장개방을 미루는 대신 일정량의 외국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게 됐다. 1995년 국내 소비량의 1%에서 시작한 의무 수입 쌀은 주로 막걸리 같은 가공용으로 풀렸다. 비율은 2004년에 4%까지 늘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막걸리를 집어 들고 ‘원재료명 및 함량’ 표시를 살피면 적지 않은 제품이 외국산 쌀로 빚은 것이다. 드물게 찾은 국내산 백미를 넣은 막걸리는 값이 만만치 않아 슬그머니 놓게 되고 만다.
요즘 한국 막걸리는 해외에서도 인기다. 한 양조장의 올해 3분기 누적 수출액은 지난해보다 50% 늘었고 수출국도 16개국으로 넓어졌단다. 저온살균으로 소비기한을 1년까지 늘리고 말차·리치 맛 막걸리까지 내놓은 덕분이다. 하지만 외국산 쌀로 빚은 막걸리가 아무리 많이 팔려도 그 이익은 우리 들녘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이 보르도의 포도로 빚어 그 이름을 얻었듯 국내산 쌀로 빚되 값이 합리적인 막걸리의 대중화가 시급하다. 농림축산식품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막걸리용 국내산 쌀의 원료 구매와 계약재배를 뒷받침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막걸리가 다시 농촌을 살리는 농민의 술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주영하 음식 인문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 교수
